야고보 성인은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 중 한 명으로서 세베데와 살로메의 아들이며 복음서를 쓴 요한 성인의 동생이다.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을 하늘의 불로써 징벌하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그에게는 보아네르게스(그리스 어로 <천둥의 아들>)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야고보는 처음으로 예수의 부름에 응한 사람들 중의 한 명이며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이후에 전 세계로 복음을 전파하러 떠난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야고보도 전도를 위해 이베리아 반도로 갔다. 몇몇 기록에 의하면 그는 이곳 주민들에게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 것 같다.

7년 뒤에 그는 여전히 로마인들에게 점령당한 채 기독교인들이 모진 박해를 당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간다. 이때 야고보는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시키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마술사 헤르모제네스다. 이 사도의 포교가 점점 더 큰 성공을 거두자 분노한 유대인들은 그를 붙잡아서 로마인들에게 넘겨주었다. 열두 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인 그는 기원후 44년 유대의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명령에 따라 참수되었다.

그리하여 야고보 성인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그의 신봉자들은 그의 유해를 훔쳐 배에 실었고, 천사들이 물길을 안내하였다. 7일간의 항해 끝에 그들은 갈리시아 지방에 있는 이리아 플라비아, 지금의 파드론 마을 근처에 상륙했다. 야고보 성인의 유해는 관으로 변한 바위 위에 안치되었다. 복음의 계시에 적대적인 이 지역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친 그의 신봉자들은 결국 루파(암 늑대) 여왕에게 묘지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했다. 여왕은 그들에게 산을 가리켜 보였다.

이 산으로 가서 야생 황소들을 찾아내어 수레에 매단 다음 여기에 성인의 관을 싣고 가서 적당한 장소에 묻으면 되리라는 것이었다. 물론 여왕은 그들이 이 야수들을 길들일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그러자 여왕은 신봉자들을 추격하라며 군대를 보냈지만 병사들은 불어난 급류에 길이 막히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루파 여왕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로 하고 신봉자들에게 야고보의 유해를 자신의 궁궐을 둘러싼 성벽 내부에 묻으라고 제안하였다. 성인이 어디 묻혔는지 그 정확한 위치는 7백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망각 속에 빠져버렸다.

810년경에 은둔자인 펠라지우스, 혹은 펠라요는 초자연적 현상을 목격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꿈속에서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묻힌 장소를 계시 받았다. 그는 테오도미르 주교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고 그와 함께 들판 위에서 반짝이는 신비로운 별의 인도를 받아가며 묘지를 찾으러 떠났다. 펠라지우스와 테오도미르는 세 개의 관이 묻혀 있는 무덤을 발견했다. 주교는 이것이 야고보 성인과 그의 동행자인 아테나세와 테오도르의 관이라고 즉시 확신했다. 무덤이 있던 곳은 캄푸스 스텔라에(별이 떠 있는 들판)라고 불렸다가 <콤포스텔라>로 바뀌었다.

이 소식은 아스투리아Astrues 왕국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알폰소 2세 왕은 즉시 이 캄푸스 스텔라에에 성당을 건설하도록 했다. 야고보 성인 숭배는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콤포스텔라의 명성은 기독교세계 전역에 멀리 퍼져나갔다가 11세기에서 14세기 사이에 황금시대를 맞았다. 성년(聖年)[야고보 성인의 축일인 7월 25일이 주일인 해]이 되면 무려 40만 명이나 되는 순례자들이 성인의 무덤을 향해 걸었다. 십자군운동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성문이 13세기 중반에 터키 인들에게 점령당해 완전히 닫혀버리는 바람에 콤포스텔라 순례길은 더욱 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게다가 갈리시아 지방으로 향하는 이 순례는 시작되자마자 중세유럽 전역에 놀라운 영적 활기와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그 덕분에 인간들은 서로에 대해 아는 법을 배우고 그들이 가진 과학과 의학, 철학 분야의 지식을 전해주면서 각자의 문화를 풍요하게 살찌웠다.

이처럼 이로운 상호교류가 이뤄지지 않았더라면 안달루시아 모자랍 양식 석공들의 다변장식 아치는 프랑스와 나바라 공국의 성당 입구를 장식하지 못했을 것이며, 프랑스 부르고뉴나 프와투 지방의 명인들은 그들의 기술과 로마네스크식 건물의 단순명료한 선을 카스티야와 에스트레마두라 지방까지 수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처에서 도시와 마을들이 세워졌고, 강을 건너도록 다리가 건설되었으며, 크고 작은 성당들이 건립되었고, 순례자들과 여행자들, 극빈자들을 받아들여 치료해주기 위해 병원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14세기 들어서부터 콤포스텔라 순례는 서서히 잊혀져갔다. 스페인 영토 회복이 완수되었고, 백년전쟁에 이어 16세기의 종교전쟁이 발발하면서 순례자들이 유럽을 여행하는 것이 위험해졌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성인을 기리며 걷는 순례자들을 보호해주는 임무를 띠었던 전투교단들은 그들이 지나치게 강력하고 위협적이어서 자기들의 권력이 약화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왕들에 의해 해체되었다… 그리하여 이 옛길에 순례자들의 발길이 다시 울려 퍼진 20세기까지 오랜 가사(假死)상태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세 번째 천 년으로의 이행은 대재앙이나 세상의 종말 없이 이루어졌으며,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매혹은 예상과는 전혀 달리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2006년에도 순례자의 숫자가 증가했다…. 그렇지만 떠나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일이 단순히 운동을 겸한 긴 산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들 알거나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순례길에 도전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의 대면 훨씬 이상의 것이다. 몇 주일 동안 계속 걸을 수 있는 신체 능력이 자신에게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비합리적인 자연에 대한, 혹은 선입견에 근거한 두려움이 덧붙여진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기원과 역사에 의해 가톨릭교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강한 암시적 의미가 오늘 날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수상쩍어 보일 수도 있다. 산티아고, 그것은 과거로의 회귀나 체제유지주의의 잠재적인 형태, 반동적이거나 광신적인 위험한 경향이 아닐까? <산티아고를 향해 가는 사람들은 도보여행자로 떠났다가 순례자로 돌아온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단어들의 의미에 의견이 일치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의 쇄신과 성공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은 아마도 이 같은 현상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들의 의미가 바뀔 만큼 유례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현상은 단어의 전통적인 의미에서는 순례다. 왜냐하면 한 개인이 그가 평상시에 살던 장소에서 상징적이거나 신화적인 장소를 향해 이동하는 것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에서 아브라함은 신의 부름에 응하기 위해 자기 집을 떠난 최초의 순례자다. 그는 40년 동안 사막을 떠돌아다니다가 이스라엘로 돌아갔다. 고대 이후로 신자들은 예루살렘과 로마를 향해 여행했고, 중세 때부터는 산티아고로 향했다. 이 같은 형태의 순례가 기독교인들과 서양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회교도들은 메카나 다른 성스러운 도시로 갔고, 힌두교도와 불교도, 자이나교도나 시크교도들에게도 그들만의 성지가 있었다. 오늘날 산티아고는 루르드라든지 로마, 혹은 파티마 같은 다른 기독교 순례지와 구분되는데, 최종 목적지가 순례길과 비교해서 덜 중요한 장소를 차지하고 있으며 순례는 오직 도보로만(물론 말이나 자전거를 이용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갈리시아 지방에 있는 성지에 도착하는 순간 순례자는 자기가 순례길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순례길이 자신을 순례자로 만들기도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파리에서 출발하여 목적지까지 이틀이 남은 갈리시아 지방의 레보레이로에서 만났던 작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는 길 위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운명을 향해 걷다가 순례자가 되었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야고보 성인의 도시는 또 하나의 구간, 그리고 굳이 말하자면 하나의 목적지에 불과하다. 대성당의 성골함에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들어 있든 들어 있지 않든, 그게 뭐 중요하단 말인가. 세 번째 천 년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는 지금 현재를 사는 신자들은 더 이상 성(聖)유골을 숭배하지 않는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순례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 자신의 삶이 걷게 될 길을 미래를 위해 꾸며보아야겠다는 도전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순례자들 대부분은 대단원을 장식하는 뜻에서 이 여행의 궁극적인 상징으로서 그 의미가 산티아고 순례보다 앞서 있는 카보 피스테라까지 더 걷는 것이다. 이들은 마지막 의식으로서 입고 있던 낡은 옷을 불태운 다음 새 옷을 입고 새로운 인간으로서 다시 출발한다.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여행은 처음 출발할 때는 산행처럼 느껴지지만, 며칠이 지나거나 어떤 시련을 겪게 되면 또 다른 차원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여행이란 그것이 프랑스나 스페인 등 유럽 내의 자기 집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익숙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존재하는 여행 중에서도 여행자를 가장 당황하게 만드는 길고 모험에 찬 여행이다. 내게 있어 산티아고를 향해 걷는다는 것은 파타고니아의 운하라든지 힌두쿠시의 산들, 아니면 호주의 덤불지대를 여행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현기증 나는 경험이었다. 지리적 차원의 유랑, 우리가 흔히 의미하는 바에서의 <여행>은 여행자를 즐겁고 풍요하게 해주는 행위지만, 그것은 우리를 우리의 일상이나 사회생활로부터 좀처럼 분리시켜 주지 않는다.

우리는 몇 시간만 비행기를 타면 지구 반대편으로 갈 수가 있고, 우리의 안락함을 보존할 수가 있으며, 우리의 식습관을 바꾸지 않고 음식을 먹을 수가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무전여행> 여행조차도 편안해졌으며, 일체의 무모함을 잃어버렸다. 전 세계 곳곳을 여행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목록이 잘 작성되어 있고, 완전히 서구화되었으며, 각자가 친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계속 유지하는 사이버카페들(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를 따라다니며 감시하는 핸드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것은 우리 어머니와 아내, 혹은 남편, 회사 사장을 빅브라더로 만들어놓았다)이 갖추어진 장소에만 빈번히 가는 것으로 한정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흔히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고 주장할 때조차도 평소의 습관과 속박에 얽매인 채 여행을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포기>는 최소한으로만 이뤄지거나, 아예 이뤄지지 않는다. 반대로 산티아고를 향한 여행은 정상적인 지리적 여행으로 귀착될 수가 없다. 며칠, 혹은 2,3주가 지나면 이 여행은 우리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향하는 내적(內的) 항해가 된다. 인간은 그의 진정한 본질을 찾아 떠나는데, 아마도 그것은 정착생활이 그를 지루하게 만들고, 그를 그 자신으로부터 떼어놓고, 그를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도록 만들기 때문이리라. 투아레그 족 유목민들은 정착민들의 누에고치인 집이 산 자들의 무덤이라고 말한다. 작크 아탈리도 최근에 펴낸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착생활은 인간 역사에서의 짧은 괄호에 불과하다. 인간은 삶의 본질 속에서 유목생활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다시 여행자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Jacques Attali, , Fayard, 2003.]

유목민은 온갖 종류의 돌발사와 위험에 순응하기 때문에 열려 있어야 하고, 자기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에너지를 찾으면서 자기 자신을 강화시켜야 한다. 운동은 집안에 틀어박혀 있기를 좋아하며 포근한 안락함에 익숙해진 현대인에게 위험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자아를 분열시킬 수도 있고, 카타르시스로 이용될 수도 있고, 아니면 전개되는 삶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체의 내적 여행과 자성(自省)이 그러하듯 대부분의 경우에는 오히려 유익한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 글은 과거 이재형 님께서 과거 홈페이지 올려 주신 글을 다시 올린 것이며, 사진 역시 이재형 님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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